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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dddbbb
★ 평점 : 10 점
⚇ 조회수 : 1,7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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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바보같은 우리
“너 또 아무렇지 않은 척하네.”
밤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ㅇㅇㅇ은 천천히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았다.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잔이었다.
“무슨 소리야?”
“뭐긴. 예준이형이랑 채영이. 너도 느꼈잖아.”
ㅇㅇ은 자연스럽게 눈을 돌렸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음악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그랬다. 누구는 새로 나온 곡에 대해 이야기했고, 누구는 다음 프로젝트를 논의했다. 그리고 누구는—
“괜찮아. 나 이제 다 잊었어”
그녀는 짧게 답하며 술잔을 들었다.
밤비가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도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맨날 그 소리. 근데 난 네 표정이 읽힌다고.”
ㅇㅇㅇ은 피식 웃었다.
“넌 너무 많이 읽어.”
“그럴 수도 있지.”
밤비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예준과 채영.
ㅇㅇㅇ은 다시 그 장면이 떠올랐다.
저녁 녹음이 끝난 후.
모두가 자연스럽게 어울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예준은 늘 그렇듯 무심하게 채영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괜찮아? 오늘 녹음 힘들었을 텐데.”
그의 목소리는 질투 날 만큼 다정했다.
ㅇㅇㅇ은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예준은 원래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채영을 대하는 태도에는 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씩 무너지는 걸 느꼈다.
예준은 정말 채영을 좋아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그걸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ㅇㅇㅇ 너 진짜 바보 같아.”
밤비가 말했다.
ㅇㅇ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
“그냥. 바보 같다고.”
밤비는 술잔을 한 손에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준이형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쓰면서, 또 티는 안 내려고 하고. 근데 다 티 나거든? 너만 모를 뿐이지.”
“—야.”
“그리고 말야. 난 네가 왜 이렇게까지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예준이형이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ㅇㅇㅇ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예준은 대단한 사람이다.
그녀가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가장 닮고 싶었던 사람이었고, 가장 동경했던 사람이었고, 그리고 가장 오래 짝사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밤비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몰라. 이제 포기했다니까”
그녀는 결국 그렇게 답했다.
밤비는 한숨을 내쉬며 술을 마셨다.
“그래, 네가 그렇다는데.”
ㅇㅇㅇ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다는 건 어쩌면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이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밤비는 술잔을 한 번 빙글 돌리더니, 한 모금 마셨다.
“네가 너무 많이 신경 쓰니까, 나도 신경 쓰이잖아.”
ㅇㅇㅇ은 순간적으로 밤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뭔 소리야?”
“모르면 됐어.”
밤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술잔을 탁 내려놓고, 몸을 기대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ㅇㅇㅇ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밤비의 농담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 멀리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향했다.
“아, 형 또 취한 거 아냐?”
하민이 말했다.
ㅇㅇㅇ은 반사적으로 예준을 찾았다. 그는 테이블에 한 팔을 걸친 채 술잔을 흔들고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기분 좋아 보이는데?”
은호가 하민의 옆에서 중얼거렸다.
“형, 괜찮아요?”
은호가 예준에게 다가가자, 예준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응? 아… 은호야.”
그는 천천히 웃었다.
“나 지금… 기분 좋거든. 그러니까 그냥 둬.”
ㅇㅇㅇ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준은 술을 잘 마셨지만, 이렇게까지 취한 모습을 보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야, 남예준. 괜찮아?”
ㅇㅇㅇ이 가까이 다가가자, 예준이 고개를 들었다.
“…ㅇㅇㅇ?”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예준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너, 왜 멀어지려고 해?”
ㅇㅇㅇ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헛소리야.
라고 말해야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예준이 형이 잠을 잘 못 잤나 봐. 잠꼬대를 하시네”
밤비가 빠르게 개입하며 예준의 손을 자연스럽게 떼어냈다.
“형, 그냥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밤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넘겼고 예준은 피곤한 듯 눈을 깜빡였다.
ㅇㅇㅇ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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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만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너, 왜 멀어지려고 해?”
예준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가 술에 취해서 한 말일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 취해서 한 말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 사람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ㅇㅇㅇ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왜, 머리 아파?”
“아니, 그냥.”
밤비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또 괜한 생각하는 거 티 낸다.”
“….”
ㅇㅇㅇ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밤비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마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ㅇㅇㅇ은 가만히 술잔을 들었다.
“넌 항상 나한테 술 권하더라.”
“너랑 마시는 술이 제일 재밌으니까.”
밤비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자신도 술을 들이켰다.
이런 밤은 익숙했다. 가끔은 예준 때문에 가끔은 그냥 힘든 날. 그럴 때면 둘은 술을 마시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야, 그때 기억나?“
”어떤 거?“
”우리 키스했던거.“
ㅇㅇㅇ은 술잔을 내려놓다 말고 손을 멈췄다.
“…갑자기 그 얘길 왜 해?”
“문득 생각나서. 기억하고 있었네?”
“기억 못 할 수가 있냐? 내가 한 최고의 미친짓이었는데.”
둘 다 취해 있던 날이었다. 그날도 지금처럼 술을 마시고 있었고 분위기에 취해 무심코 입을 맞췄다.
그런데 그 이후로 둘은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ㅇㅇ은 키스를 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았고 밤비도 선을 넘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선을 넘을 듯, 넘지 않는 관계였다.
“아직도 궁금해.”
“뭐가?”
밤비는 술잔을 돌리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때 네 기분.”
ㅇㅇㅇ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때의 감정은 사실 지금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가 없었다.
말문을 닫은 채 조용히 잔을 비우자 밤비도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일어나더니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무너지듯 몸을 눕혔다.
“나 조금 잘게. 깨우지 마.”
툭 던진 말처럼 무심했지만 그 안에선 어쩐지 회피의 냄새가 났다.
그렇게 밤비까지 잠들고 나자 테이블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제 다들 술에 취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하거나 의자에 기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시끄럽던 테이블은 어느새 조용해졌고 빈 병들만 남아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ㅇㅇㅇ은 혼자 남은 잔에 술을 천천히 따랐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조용한 틈.
그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하민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ㅇㅇㅇ이 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며 묻자 하민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옆으로 천천히 옮겨 앉았다.
“그냥 누나 또 갑자기 술 많이 마시길래.”
“술이 뭐 어때서.”
툭 내뱉은 말에 하민은 잠시 웃음만 흘렸다.
“평소엔 이 정도도 안 마시잖아요.”
ㅇㅇㅇ은 대꾸 없이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놨다. 유리잔 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하민아.”
“…네.”
“너도 좀 마셔.”
그녀가 병을 들어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하민은 아무 말 없이 잔을 들고 그녀와 잔을 맞댔다.
“짠.”
말 없는 건배. 쓰디쓴 액체가 목으로 넘는 소리만이 테이블 위에 남았다.
하민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준이 형이랑 아까 뭐였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ㅇㅇㅇ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긴. 그냥… 취해서 헛소리한 거지.”
“진짜요?”
하민의 눈빛이 묘하게 날카로웠다. 무언가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왜 그런 걸 묻는데?”
“그냥-”
하민은 시선을 돌린 채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낮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ㅇㅇㅇ의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금세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야 넌 원래 그렇게 쓸데없는 참견 잘하냐?”
“누나가 쓸데없는 짓 하니까요.”
하민의 말은 언제나 뼈가 있었다.
언제나 그녀의 심장을 정통으로 찔렀다.
하민의 말이 가시처럼 박혔다.
ㅇㅇㅇ은 들고 있던 술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하민아.”
“네?”
“너 예준이한테 무슨 악감정 있어?”
하민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너 이상하게 예준이 관련된 일엔 나한테 더 날카롭잖아.”
그녀는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거슬려?”
하민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짜증 나서요.”
“뭐가.”
“나라면 그렇게 안 할텐데.”
말 끝에 떨어진 목소리는 깊었다.
“하민아 나한테 신경 꺼.”
하민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꺼줄 수 있으면 꺼드릴게요.”
ㅇㅇㅇ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네 성격은 예전부터 변함없네.”
“누나도 마찬가지고요.”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멀리서 은호가 그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뭐야 둘 또 티격태격 중?”
ㅇㅇㅇ은 일부러 어깨를 으쓱하며 분위기를 풀었다.
“얘가 잔소리가 늘었어. 은호야 얘 원래 이렇게 잔소리하는 애였냐?”
“난 원래부터 이랬는데요?”
하민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은호는 웃으며 분위기를 돌리려 했지만 ㅇㅇㅇ은 알았다.
하민이 방금 한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난 원래부터 이랬는데요?”
그렇다면, 난 그걸 왜 이제야 깨닫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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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이 끝나고도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ㅇㅇㅇ은 조용히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었다.
취기가 조금 올랐다.
“왜 혼자 나왔어?”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노아가 서 있었다.
“그냥 답답해서.”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옆에 섰다.
“오늘은 좀 많이 마셨네.”
ㅇㅇㅇ은 피식 웃었다.
“그런가.”
노아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봐. 남예준 때문에 그런 거지?”
ㅇㅇㅇ은 흠칫했다.
“…다 티 나?”
“응. 티 많이 나.”
노아는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너 예준이 좋아하는 거 다들 알고 있어.”
노아의 말에 ㅇㅇㅇ은 말문이 턱 막혔다.
“…다들?”
ㅇㅇㅇ은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예준이는?”
노아가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
ㅇㅇㅇ은 다 들켰다는 사실에 괜히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찼다.
이제 와서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근데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말해봤자 너 인정 안 할 거잖아.”
“그건….”
ㅇㅇㅇ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굳이 말 안 해도 뻔한데?”
노아는 느긋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넌 예준이가 뭘 하든 신경 쓰고 상처받고. 그래도 결국 좋아하잖아.”
ㅇㅇㅇ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냥 네가 그렇게 살겠다고 하면 우리는 뭐.”
노아는 담담하게 웃었다.
“지켜보는 거지.”
ㅇㅇㅇ은 그 말에 묘하게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모두가 알고 있었다면
그럼 예준이도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걸까.
“…바보 같지?”
ㅇㅇㅇ은 작게 중얼거렸다.
노아는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음, 조금?”
그는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툭 치고는 말했다.
“근데 우리 중엔 너만큼 바보인 애들 또 많아.”
ㅇㅇ은 노아를 바라봤다.
“..너도 포함이야?”
노아는 웃으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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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은 한참을 밖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너무 지쳤다.
‘다들 알고 있어.’
노아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준이도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 때쯤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네.”
낯익은 목소리에 ㅇㅇ은 고개를 들었다.
예준이었다.
“괜찮아?”
그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ㅇㅇㅇ은 순간 울컥할 뻔했지만 힘겹게 삼켰다.
“응. 그냥 바람 좀 쐬려고.”
예준은 그녀의 앞에 서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이 사람은 원래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평소에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나 그 다정함이 모두에게 같다는 걸 알기에 ㅇㅇㅇ은 괴로웠다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ㅇㅇ은 예준의 다정한 목소리에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예준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아팠다. 너무 아파서 ㅇㅇㅇ은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오늘 힘들었지?”
“녹음 말하는 거야?”
“그것도 그렇고.”
예준은 한 발 다가섰다. 가까워진 거리가 숨막히게 느껴졌다.
ㅇㅇㅇ은 천천히 숨을 삼켰다.
“괜찮다니까.”
또 같은 대답. 또 같은 거짓말.
예준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때문에 그런 거야?”
ㅇㅇㅇ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알고있어도 모르는 척해. 제발. 모르는 척.’
“무슨 소리야. 그냥 술 좋아해서 마셨지.”
그녀는 애써 웃으며 넘겼다.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투, 아무렇지 않은 표정.
그러나 예준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가끔 너무 무서워.”
“뭐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 진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거.”
ㅇㅇ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예준아, 왜 그래 평소답지 않게.”
“….”
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 옆에 섰다. 그리고 둘 사이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ㅇㅇ은 알아차렸다.
“그래 나도 물어나보자. 너 오늘 왜 그랬어?”
“응?”
“술자리에서. 내 손목 잡고 그런 말 하고.”
예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 안 나?”
“…기억나.”
짧은 대답이었다.
ㅇㅇ은 괜히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켰다.
“그럼 그냥 헛소리는 아니었네.”
예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밤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ㅇㅇㅇ.”
“…응.”
“나는 너랑 멀어지는 게 싫어.”
“…”
“그냥 싫어.”
그 말은 고백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관심하다는 뜻도 아니었다.
애매한 온도.
ㅇㅇㅇ은 그 온도가 더 아팠다.
그래서 웃었다.
“그치 맞아. 너랑 난 원래 이런 사이야.”
“무슨 뜻이야.”
“선을 넘지 않는.”
ㅇㅇ은 조용히 말했다.
“넌 다정하게 대해주고, 나는 그 다정함에 기대고. 그러다 가끔 착각하고.”
예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응 봐. 너도 정말 알고있나봐. 진짜 나 빼고 다 알았네, 나 바보같은 거.”
ㅇㅇ은 조용히 담담하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마음을 죽여나갔다.
예준은 고개를 돌려 멀리 어둠 속을 바라봤다. 계속해서 침물을 지키는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결국 ㅇㅇ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들어가자.”
“ㅇㅇㅇ.”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좋아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마음 어딘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ㅇㅇㅇ은 웃으려다 말았다. 그리고 진짜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늦었어. 예준아.”
“왜..?”
“모두가 알고 있는 걸 너만 모르고 있었잖아. 아니다. 모른 척이었던가.”
예준의 눈이 흔들렸다.
“나 진짜 많이 힘들었어.”
“그런 의도 아니었어.”
“응. 그 말이 제일 싫다.”
ㅇㅇㅇ은 예준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예준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번엔 술김이 아니었다. 그의 손끝엔 망설임이 있었고 단념하려는 듯한 흔들림도 있었다.
“미안해. 그땐 확실하지 못했어. 그래도 지금은 다 알아.”
ㅇㅇㅇ은 그의 손을 천천히 뿌리쳤다.
“그걸 이제야 알면 뭐해.”
그리고 조용히 돌아섰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노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너만큼 바보인 애들 또 많아.”
어쩌면 이 밤은 바보들이 부딪히는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는 너무 늦게 알아버린 바보
누구는 너무 오래 기다린 바보
누구는 아예 말조차 못 꺼내는 바보.
그리고 그 바보들 속에서 ㅇㅇ은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다정함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버린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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