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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몽오
★ 평점 : 10 점
⚇ 조회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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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매일 연습실에 조금 일찍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애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려고 했다.
도착해보면 항상 책상이 가지런했고, 대본이 펼쳐져 있었고, 히터가 따뜻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 애가 나보다 먼저 왔다는 걸 늘 확인하게 됐다.
“선배, 오늘은 늦었네요.”
그 애는 꼭 그렇게 말한다.
지각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먼저 와 있으면 내가 늦은 게 된다.
“너 몇 시에 오는 거야, 대체.”
“그냥… 시간 남으면 일찍 와요.”
그 애는 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 ‘시간 남는’ 이유가 내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싶어, 입을 다물고 대본만 넘겼다.
근데 대본에 집중이 잘 안 됐다.
자꾸 신경이 쓰였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내 대사 줄, 그 옆에 있던 동민의 필기,
그리고 그 애가 가져온 따뜻한 물컵.
어쩌다 보니, 나는 요즘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날 연습에서, 그 애는 내 상대역이었다.
장면은 다툼이 오가는 격한 신인데, 애초에 감정을 주고받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 애는 늘 담담하고 말수가 적다.
근데 그날따라 이상했다. 동민의 눈빛이 예전보다 더 단단하게, 어딘가 뜨겁게 보였다.
“눈 피하지 마요.”
대본에 없는 말이었다. 순간 나는 대사를 잊었고,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동민을 쳐다봤다.
그는 대본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선배. 계속 눈 피하시니까 감정이 안 들어와요.”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 애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요즘 말이 좀 많다.”
그 애는 눈길만 살짝 내렸다.
“그런가요. 근데… 선배, 예전엔 안 이랬어요.”
“…어떨 땐?”
“작년 겨울. 조명 네 번째 자리에서 말할 때요.”
또 그 공연.
또 그 장면.
하필, 내가 잊고 싶은 무대였는데.
그 애는 그 장면을 계속 꺼내 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민은 뭔가 더 말할 듯하다가, 그냥 조용히 대본을 넘겼다.
연습이 끝난 뒤, 나는 그 애를 따라 나갔다.
평소처럼 소품 정리를 마친 뒤, 정수기 옆에서 물을 뜨고 있는 모습.
매번 보던 장면이었는데, 왠지 그날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작고 조용한 등이 괜히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야.”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그 장면, 네가 그렇게까지 기억하는 이유가 뭐야?”
나는 묻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어쩌면 아무 일 아닌 듯 묻고 싶었는데, 목소리는 조금 떨려 있었다.
감정이 앞서진 않았는데, 묘하게 긴장이 됐다.
“그날, 네가 거기 있었다는 걸… 자꾸 생각하게 돼서.”
한동민은 컵을 쥔 채 멈춰 있었다.
조금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때 선배가 무대에서 울었잖아요.”
“…그건—”
“끝나고도, 혼자 남아서 울었어요.”
숨이 막혔다.
그 무대 뒤편, 아무도 없는 조명 아래에서 혼자 대본을 접고 울던 날.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밤은 그냥 다 끝났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날 보고 나서… 이상하게 연기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 애는 그렇게 말하곤, 컵을 내려놓고 복도로 걸어 나갔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물도 못 뜨고, 대답도 못 하고.
복도 끝, 문 앞에서 그 애가 돌아봤다.
“선배.”
“…”
“내가 연기하는 건, 그냥 연습이 아니에요.”
그 말이 툭 떨어졌다.
짧고 간결했는데, 어딘가 울리는 말이었다.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걸, 딱 그만큼만 정확하게 건드리는 말.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복도 끝 조명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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